문화
일본 회화의 신성 토모코 나가이, 서울서 '빛의 종이접기' 공개
작성 : 2026.05.15. 오후 06:35
일본의 중견 작가 토모코 나가이가 서울 종로구 페로탕 서울에서 개인전 ‘빛의 종이접기와 양배추색 커튼’을 선보이며 국내 관객들과 만난다. 이번 전시는 곰인형, 토끼, 무지개 등 지극히 사소하고 사랑스러운 도상들을 통해 현실과 상상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나가이만의 독창적인 회화 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얼핏 동화 속 한 장면처럼 평온해 보이는 화면 속에는 기억과 욕망, 노스탤지어와 불안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있어 관람객들에게 단순한 시각적 즐거움 이상의 감각적 경험을 선사한다.1982년생인 나가이의 작업은 어린 시절의 파편화된 기억과 일상 속 사물들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소녀와 동물, 꽃과 피크닉 세트, 그리고 실바니안 패밀리 인형 같은 친숙한 모티프들은 작가의 직관적인 구성과 만나 독특한 화면 구조를 형성한다. 그녀의 작품 속 공간은 르네상스식 원근법을 철저히 배제한 채 평면적으로 펼쳐지는 것이 특징이다. 방 안의 카펫이 밤하늘로 이어지거나 화분 속 꽃이 거대한 정글로 확장되는 등 현실과 환상,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자유롭게 허물어지는 마법 같은 공간이 캔버스 위에 구현된다.

나가이의 회화가 지닌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귀엽다’는 수식어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화면 표면에는 색과 붓질, 스프레이로 입힌 그라데이션 층위가 정교하게 쌓여 있어 깊이감을 더한다. 이는 이른바 ‘기술적 순진함’이라 불리는 양식으로, 자유분방해 보이는 필치 뒤에는 철저히 계산된 균형감과 안정된 구성력이 숨어 있다. 아이치현립예술대학에서 유화를 전공하며 고전적 소묘와 아카데믹한 미술 교육을 거친 작가의 탄탄한 기본기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결과물이다.
작업 방식 또한 독특하다. 나가이는 별도의 밑그림 없이 머릿속에 그려진 청사진을 따라 직관적으로 붓을 움직인다. 빠른 속도감과 즉흥적인 화면 구성은 고도의 집중 상태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가 언급한 라스코 동굴벽화의 ‘천재적 순발력’을 연상시킨다. 캔버스 위를 유영하는 체크무늬와 물방울, 다양한 캐릭터들은 작가의 내면에서 솟아오른 이미지들이 즉각적으로 시각화된 결과물이며, 이는 동시대 회화의 새로운 문법으로 평가받는다.

동시대 회화의 맥락에서 나가이의 작업은 엘리자베스 페이턴이나 카렌 킬림닉 등 사적 기억과 키치적 서사를 회화 안으로 끌어들인 작가들의 계보와 맞닿아 있다. 그녀는 느슨하고 자유로운 붓질 속에 새로운 세대의 감각을 담아내며 회화와 일러스트, 디자인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든다. 과거 일본 NHK 어린이 프로그램의 오프닝 작업을 맡기도 했던 그녀의 이력은 대중문화의 시각적 요소를 순수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현대적인 미감을 창조해내는 능력을 입증한다.
현재 토모코 나가이의 작품은 도쿄도 현대미술관, 아이치현 미술관, 그리고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리크스 뮤지엄 등에 소장되어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번 페로탕 서울에서의 전시는 6월 27일까지 이어지며, 관람객들은 인형의 집 속을 들여다보듯 입체적이면서도 평면적인, 진짜 같으면서도 가짜 같은 나가이만의 기묘한 공간감을 만끽할 수 있다. 작가가 캔버스 위에 정교하게 접어 올린 ‘빛의 종이접기’는 현대 회화가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