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추상인 줄 알았는데 극사실? 박성민의 반전 회화

작성 : 2026.07.24. 오후 06:45
 인공지능이 단 몇 초 만에 정교한 이미지를 복제해내는 시대에, 인간의 시선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의 지점을 탐구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울 강남구 슈페리어갤러리에서 진행 중인 박성민의 개인전 ‘시선이 사유가 될 때’는 재현의 기술을 넘어 회화의 본질적인 가치를 묻는다. 작가는 도자기라는 사물을 단순히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표면에 축적된 시간과 물성을 해체하여 캔버스 위로 옮겨온다. 이는 대상을 똑같이 옮겨 적는 복제를 넘어, 대상을 응시하는 행위 자체가 예술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얼핏 보면 화면은 색면 추상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뿌리는 철저히 극사실 회화에 닿아 있다. 작가는 도자기 유약의 미세한 균열과 색의 번짐, 그리고 매끄러운 질감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이를 극도로 확대한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본 결과, 사물의 형체는 사라지고 오직 물성과 붓질의 흔적만이 남게 된 것이다. 관람객은 무엇이 그려졌는지 파악하기 전에, 화면 전체를 휘감는 압도적인 시각적 몰입감을 먼저 경험하게 된다. 사물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작가의 깊은 사유와 응시의 시간이다.

 


박성민 작가의 예술적 여정은 과거 ‘아이스 캡슐’ 연작에서 보여준 응고된 시간의 탐구와 맥을 같이 한다. 얼음 속에 갇힌 식물을 통해 생명력의 정지된 순간을 포착했던 작가는, 이제 도자기라는 사물의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근의 작업들은 사물의 외형을 재현하는 단계를 지나, 그 표면에 맺힌 촉각적 기억과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화면 밖으로 끌어낸다. 이는 작가의 시선이 사물의 껍데기를 뚫고 본질적인 물성의 영역으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이번 전시는 기술 만능주의 시대에 회화가 지닌 고유한 힘을 증명하고 있다. AI가 학습할 수 없는 것은 결과물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대상을 마주하고 고뇌하며 붓을 움직이는 인간의 집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재현을 포기하는 대신 오히려 재현의 밀도를 극한까지 밀어붙임으로써 회화만이 도달할 수 있는 사유의 영역을 구축했다. 관람객들은 작품 앞에서 ‘얼마나 똑같은가’를 따지는 대신, ‘얼마나 오래 바라보았는가’를 감각하며 인간적 사유의 가치를 되새기게 된다.

 


전시장 내부를 채운 검은색과 푸른빛의 경계, 옅은 분홍의 번짐은 도자기의 유약이 불 속에서 겪었을 변화를 상기시킨다. 작가는 캔버스라는 평면 위에 유약처럼 미끄러지는 표면을 구현하기 위해 수많은 붓질을 중첩했다. 이러한 노동 집약적인 과정은 디지털 이미지가 줄 수 없는 깊이감과 아우라를 형성한다. 화면 위에 맺힌 미세한 결들은 작가가 대상을 향해 보낸 수천 시간의 시선이 응축된 결과물이며, 이는 곧 관람객에게 전이되어 깊은 명상의 시간을 제공한다.

 

박성민의 개인전은 오는 8월 10일까지 계속되며, 현대 회화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사물을 파괴하거나 왜곡하지 않고도, 오직 시선의 힘만으로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허물어뜨렸다. 이번 전시는 화려한 기술적 수사보다 묵묵히 대상을 바라보는 행위가 어떻게 예술적 숭고함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중한 기회다. 슈페리어갤러리의 정막한 공간 속에서 관람객들은 작가가 빚어낸 사유의 바다를 유영하며 회화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