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조각가가 6년 만에 돌아와 '두루마리 화장지'만 쌓고 있는 충격적인 이유

작성 : 2025.09.09. 오후 05:15
 조각가 백연수가 6년이라는 긴 시간의 무게를 응축하여 새로운 개인전으로 돌아왔다.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 ‘끝나지 않은 장면(Unfinished Scene)’은 단순히 미완성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탐색하고 나아가는 작가의 현재진행형 모색 과정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관객과 공유하는 자리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듯 여러 장면이 겹쳐지는 ‘오버랩’ 기법을 공간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1층에서 3층으로 이어지는 각 전시실은 목조 조각이라는 큰 틀 안에서 서로 다른 장면들을 중첩시키며, 관객의 시선과 사유를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의 탐구로 이끈다.

 

첫 번째 장면이 펼쳐지는 1전시실은 거대한 통나무의 물성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최신작 '드러나는 것'과 '끝나지 않은 장면' 연작으로 채워져 있다. 작가는 나무의 원초적인 형태를 거의 그대로 살리면서도, 그 표면 위에 완벽한 구(球), 기하학적인 입방체, 탐스러운 대봉감, 가느다란 풀줄기 같은 형상들을 섬세하게 조각해 넣었다. 이는 작가가 나무라는 재료를 일방적으로 정복하려 한 것이 아니라, 나무의 결, 옹이, 갈라짐과 같은 고유한 특성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타협하며 얻어낸 결과물이다. 마치 나무가 품고 있던 형상이 작가의 손을 빌려 스스로 드러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공간에는 작가의 오랜 조형적 화두였던 과거 ‘구(球)’ 시리즈도 함께 놓여, 오래된 모티브와 새로운 실험이 한 화면 위에서 겹쳐지며 시간의 중첩을 보여준다.

 

2전시실로 걸음을 옮기면, 장면은 일상의 사물들로 전환된다. 이곳의 작품들은 사각기둥 형태의 원목 일부를 정교하게 깎아내어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을 재현한다. 주목할 점은 작품과 좌대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나무에서 이어지는 독특한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관객은 "사물이 좌대 위에 놓여 있다"고 인식하기보다, "단단한 나무 기둥에서 사물이 마치 새싹처럼 솟아났다"는 신비로운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마지막 3전시실에서는 가장 일상적인 사물인 두루마리 화장지를 소재로 한 '쌓기 연습' 연작이 관객을 맞이한다. 구체적인 사물의 재현에서 출발했던 작가의 조형 실험이 점차 형태를 단순화하고 환원시켜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작품들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 서서히 사라지며 다음 장면이 드러나는 디졸브(dissolve) 효과처럼, 관객의 시선을 구체적인 형상에서 벗어나 순수한 조형과 사유의 세계로 이끈다.

 

백연수 작가는 나무를 다루는 태도에 대해 확고한 철학을 드러낸다. "보통 나무를 다루는 사람들이 ‘나무 다루기가 어렵다’고 말하는데, 그거는 내가 주체가 돼서 나무를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하니까 어려운 겁니다. 저는 그런 말을 쓰지 않아요." 그녀에게 나무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작업하는 동료이자 자신의 노동을 가장 정직하게 받아주는 매체다.

 

1998년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한 그녀는 '여성 조각가'로서, 특히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삶이 작업에 미친 영향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쉬지는 않았지만 활발하게도 못 하고 띄엄띄엄 작업을 이어왔다"는 그녀의 말처럼, 생활의 안정을 추구해야 했던 현실은 "작업이 늘 프레임 안에 붙어 있는 형식"으로 나타나며 그녀의 작품 세계에 독특한 궤적을 남겼다. 또한 모든 것이 디지털로 기록되고 쉽게 사라지는 시대에 대한 불안감을 토로하며, "눈앞에 실제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물질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은 백연수의 작품이 "주변 일상 사물을 주목해 재현하는 점"과 "채색을 통해 실재감을 강화하는 점"을 특징으로 꼽으며, "재현을 통해 조각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탐구한다"고 평했다. 그는 이번 전시의 제목 '끝나지 않은 장면'이 "완료의 미완이 아닌 진행의 모색"을 의미한다며, 작가의 작업이 일상에서 출발하여 재료의 미학과 추상으로 나아가는 현재진행형의 여정임을 역설했다. 전시는 11월 2일까지 계속된다.